알지 더 흉노

유럽 역사에서 아틸라 더 훈이란 이름은 매우 유명하다. 동쪽 초원에서 바람을 타고 온 훈족의 침공으로 유럽의 판도 자체를 변화시킨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훈족의 왕 아틸라는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역사뿐 아니라 전설과 민담 곳곳에서 가공할 만한 존재로 묘사되어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쪽에서 아틸라 더 훈이 유럽 역사를 뒤흔들었다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동쪽에서도 비슷한 이름의 한 겨레가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다는 점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훈족은 그 기원이 중국 북방에 군림하던 흉노족이라 여겨진다. 몽골초원의 첫 지배자인 흉노는 뛰어난 기마궁술과 강인한 생명력으로 역대 중국 왕조들에게 언제나 매서운 상대였으며,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와는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승부를 벌인 맞수이다. 이는 곧 야생의 유목국가와 문명의 농경국가가 벌이는 정면충돌의 전형이기도 하다.

처음 한나라와의 대결은 흉노 측의 일방적 우세였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백등산에서 허무하게 최후를 맞을 뻔한 뒤, 한나라는 엄청난 대가를 조건으로 간신히 흉노에게서 평화를 얻어낼 수 있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장성 이북의 활을 쏘는 나라와 장성 이남의 의관속대 사람 간의 평화라 적었다.

그러나 국면은 다시 변화하였다. 문경지치를 거치며 국력이 강성해진 한나라는 마침내 한무제 유철의 등극과 함께 대반격을 시작했다. 맹렬한 공방이 벌어지고 전쟁은 40년 넘게 계속되었다. 결과는 백중지세 무승부로 양편 모두가 그로기 상태에서 비틀거렸다. 한나라는 영토를 크게 넓혔지만 민생이 파탄 나고 그 부유했던 국가 재정이 마이너스로 주저 않았으며, 흉노는 한나라군 수뇌부와 기간전력을 붕궤시켰으나 끊임없는 전략적 소모전으로 인해 깊은 내상을 입고 예전의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후 양측은 서역을 놓고 티격태격 치고받지만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서로 함께 지쳐갔다. 먼저 백기를 든 건 흉노였다. 흉노는 최고 통치자 선우의 자리를 둘러싼 오랜 혼란과 내전 끝에 분열되어, BC 51년 마침내 한나라에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150년 긴 세월 동안 치러진 두 강호 간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흉노는 한나라 황제에게 신속하여 순한 양이 되어갔고 애써 비위를 맞춰가며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한나라가 차츰 왕조 말기적 현상을 보이며 암울해지자, 흉노는 곧 거친 늑대로 돌아가 야성을 되찾게 된다.

AD 8년 중국에서는 왕망이 한나라를 폐하고 신나라를 창건한다. 새로운 황제 왕망은 좋게 보면 고결한 이상주의자로 나라와 백성을 진심으로 걱정한 애국자이지만, 다르게 보면 편집증성 개혁주의자로 현실과 인정을 외면한 전제적 야심가였다. 결국 왕망의 아름다운 뜻과는 반대로 나라는 점점 엉망이 되어갔고, 무엇보다 괜스런 흉노와의 전쟁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왕망은 국가 안위를 위한 장기적 안목과 개인 성격상의 이유로 흉노를 강하게 압박하며 집요하게 자극했다. 마침내 참다못한 흉노가 우발적으로 반항하자 왕망은 즉시 수십만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마침 대규모 민란이 발생하고 AD 23년 왕망이 스스로에게 가혹했던 삶을 마치니, 흉노족은 이내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 무제의 때에 일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 훗날 한나라에서 제후가 되는 인물인데 그 경력이 자못 이채롭다.

당시 한나라가 흉노와 크게 싸우면서, 일제는 어린 나이에 그만 포로가 되었다. 한나라는 일제를 관에 몰입하여 말을 기르도록 시켰고, 일제는 모친의 법도 있는 가르침을 받으며 남다른 몸가짐의 젊은이로 성장했다.

하루는 한무제가 궁전에서 말들을 즐겨 보는데, 일제의 기른 말이 살찌고 훌륭한데다 일제의 용모 또한 장엄하니 한무제가 기이하게 여겨 그날로 벼슬을 주고 곁에 있게 하였다. 이후 한무제는 일제를 심히 믿고 아껴 언제나 좌우에서 시위토록 했다.

사실 일제는 특별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 휴도왕은 흉노의 평범한 번왕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제 왕이었으며, 일제는 그 뒤를 이을 태자로 제천지윤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미루어보건대 일제는 모친의 가르침 아래 한나라 안에서도 옛 휴도의 전통과 신앙을 비밀히 지키며 계승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흉노의 언어로 하늘 또는 하느님을 탱리, 탱그리라 하는데 그 뜻과 소리에 있어 우리의 단군과 상통한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은 마한 천군의 소도와 흉노 휴도왕의 제천을 서로 연관 짓기도 했다.

일제에 대한 한무제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져 높은 관작과 상금이 잇따랐으며 마침내 성씨를 하사하기에 이른다. 지난날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느님에게 제사지내던 것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성은 김金씨가 되었다.

휴도왕의 금인이 어떤 신상인지는 사기나 한서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후대의 위서 석노지에 따르면 불교의 황금 부처상이었다고 전한다. 진짜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으나 나중 가야의 불교 설화를 함께 놓고 생각해보면 재밌는 데가 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한나라 조정에서 관작을 역임하며 그 증손자 김당에 이르는데, 김당과 왕망의 모친이 서로 친자매였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김씨 가문은 왕망의 신나라 정권 아래서도 지위와 벼슬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왕망이 패하고 한나라가 재건되자 김씨 가문 역시 연좌제로 인해 멸문지화에 놓이게 된다. 이에 김씨 가문이 탈출하여 당시 산동 반도에 집단 이주해 있던 투국의 휴도 흉노족 일부와 더불어 멀리 피해 달아나는데, 장성을 나와 동쪽 낙랑군에까지 망명하여 왔다.

그러나 낙랑군에서도 상황은 평탄치가 않았다. AD 24년 낙랑사람 왕조가 태수 유헌을 죽이고 스스로 낙랑태수가 되었다. 이는 곧 한나라에 반하여 낙랑군이 독립했다는 뜻이다. 이에 한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길을 연 다음, 다시 왕준을 태수로 삼아 낙랑군을 회복토록 보냈다. 왕준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자, 이번에는 낙랑사람 왕굉이 태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성 안으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한나라가 낙랑군을 되찾으니, 망명해 있던 김씨 가문은 또다시 추색을 피해 남쪽 삼한 땅으로 길을 떠나 마침내 변한의 바닷가 끝자락에 이르렀다.

당시 삼한 땅은 4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진한, 남쪽의 변한 그리고 서남쪽의 마한이다. 백제는 단일 군주국이었고 진한과 변한, 마한은 저마다 십여 개의 작은 나라들로 구성된 종족 공동체이다. 이 가운데 변한은 진한의 나라 서라벌에 소속되어 있었다. 서라벌의 대영웅 박불구내 거서간이 위명을 크게 떨쳐 진한과 변한을 아우르고 마한에서 자립한 지 벌써 수십 년이었다.

그러나 변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서라벌의 통제가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몇 해 전 진한의 우거수가 낙랑군에 투항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의 외교 문제로 진한이 낙랑군에게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치러줘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그 탓에 변한은 애매하게 엮여 들어가 베 1만 5천 필을 대신 물어주었다.

이 같이 불만스러운데도 변한이 어쩔 수 없던 것은 서라벌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무렵 서라벌은 이미 철기사회로 진입하여 노예제 국가를 형성했음에 반해, 변한은 여전히 청동기사회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맞설 재간이 부족했다.

이런 형국에서 김씨 가문이 남하해 오자 변한 사람들은 곧 그들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엿보았다. 김씨 가문이 낙랑군의 신나라 세력과 함께 내려왔기에 그 선진 기술과 문물이 변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문득 변한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했다. 만일 김씨 가문이 변한을 이끌어준다면 우리도 서라벌 못지않은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변한이라고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뜻밖에도 김씨 가문은 이와 같은 변한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을 마다하였다. 한나라의 눈을 피해 조용히 숨어살고자 한 까닭이다. 그러나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김씨 가문의 영향력은 어느새 변한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데 천우신조의 기회가 왔다. AD 37년 고구려의 대무신왕 무휼이 낙랑국을 멸망시키자, 살수 이남에서는 한나라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AD 42년 3월 마침내 김씨 가문이 변한의 구지에서 나라를 세우니 바로 수로가야이다.

수로가야의 건국 소식은 곧 서라벌에 전해졌다. 진한과 변한의 패권을 쥐고 있던 맹주 서라벌로써는 의당 정토의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서라벌이 대보 석탈해를 보내 수로가야를 공격토록 했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왕과 석탈해 간의 싸움이 도술 대결로 그려지고 있다. 석탈해는 배를 타고 가야에 들어가 수로왕과 둔갑술을 펼치며 다투다가 결국 패하여 나루터로 후퇴한다. 수로왕은 다시 수군을 보내 석탈해를 완전히 몰아냈다.

이로써 수로가야는 진한의 맹주 서라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그 입지를 단단히 굳혔으며, 변한의 수장이 되어 이후 삼한 땅의 대국을 주도하는 한 축으로써 당당히 자리매김한다.

수로가야는 경도를 정하고 궁궐과 성곽을 쌓는 등 나날이 국위를 높여나갔다. 수로왕에게는 큰 그림이 있었다. 지금은 변한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장차 삼한 땅을 통합하고 나아가 중국을 회복해 신나라 왕망의 못다 이룬 꿈을 다시 세워 천하 만민을 편안케 하리라는 포부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원천 기반으로 수로왕이 주목한 것은 바로 철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오늘날의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해당되는데, 그 경계인 낙동강을 따라 다수의 철광이 분포되어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나라에서 철이 나고 한과 예, 왜 모두가 좇아 취한다. 여러 시장에서 매매하면서 모두 철을 쓰니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에 공급한다'고 표현될 만큼 풍부한 철산지이다. 그 동안은 서라벌의 패권으로 말미암아 진한이 철의 교역을 주관해 왔으나, 이젠 수로가야가 향상된 제철기술과 낙동강 하구라는 지리적 이점을 통하여 교역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AD 44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수로왕에게 전해진다.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국을 군현으로 취하고 살수 이남에서 다시 영향력을 회복한 것이다. 따라서 수로가야의 김씨 가문과 신나라 세력이 드러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군사를 보내올 터였다. 이에 수로왕은 잠시 계획을 미뤄두고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게 된다.

수로왕이 깊은 시름에 잠긴 지 몇 해가 지났을 무렵, 남해의 파란 물결 위로 홀연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곧 수로가야의 구원이 되었다.

AD 48년 7월 수로왕이 허황옥과 혼인하였다. 뜻밖에 가야의 왕후가 된 허황옥은 여러 모로 신비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신분도, 배에 실어 온 파사석탑까지도 모두가 기묘하고 이채로웠다. 또한 먼 훗날 누군가 지어올린 보주태후란 시호에서도 역시 특별한 사연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허왕후의 미스터리한 배경은 수로가야로 하여금 그녀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한나라의 의혹을 피해 중국 군현과 백제, 마한, 왜에 이르는 철의 교역시장 점유를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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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제철 군사력과 허왕후의 해상 경제력이 결합한 가야는 곧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팽창하기 시작했다. 변한은 물론이고 진한과 마한, 왜로 뻗어나가며 확장하고 정착해 분국을 세우니 바로 가야연방의 탄생이다.

가야연방의 가장 큰 특징은 왕위를 돌아가며 맡았다는 점에 있다. 수로가야를 비롯하여 아라가야와 대가야, 소가야, 고녕가야, 성산가야에서 연방의 왕이 선출되었다. 이는 분국들이 저마다 자치권과 상호 독립권을 가졌기에, 자칫 흩어지기 쉬운 결속력과 소속감을 하나로 그러모아 유지시키기 위한 수로왕의 크나큰 용단이었다. 또한 왕망이 회복하고자 했던 주나라 예법에 기초한 봉건제의 일환이기도 했으며, 혹 한나라에 의해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제천지윤인 김씨 가문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한 마음 깊은 배려이기도 했다.

수로왕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왕망의 정치와 이상에 깊이 공감한바 있고, 가야가 처한 현실과 장차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며 중용의 도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유가의 정명사상에 따라 변한의 관명을 손보면서도, 서라벌과 중국 주나라 한나라의 직의를 알맞게 취해 관제를 새로 정비한 것이 그 일례이다.

그러나 가야의 김씨 모두가 수로왕과 방향을 같이한 것은 아니었다. 보제와 허루를 필두로 한 일각에서는 적지 않은 우려를 나타내며 연방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결국 춘추시대의 분열로 이어졌음을 상기시키며, 연방제 또한 종국에는 분산과 대립을 불러오게 되리라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연방제를 대신해서,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킨 진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군현제로써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뤄야한다고 주장했다.

연방제와 중앙집권제는 저마다 일장일단이 있다. 연방제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나라들이 연합한 국가 조직으로, 평상시에는 질서와 신뢰를 통해 지방통치가 간편하고 용이한데다, 위기 시에는 상부상조의 공동 대응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종주국이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여 분국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다면 서로 간의 손발이 안 맞아 배가 산으로 가기 일쑤이고 언제든지 연방이 와해되어 사분오열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에 반해 중앙집권제는 단 하나의 정부가 영토 내의 모든 지역을 일일이 제어하므로 통치 효율을 고도로 끌어올릴 수 있고,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지방은 중앙정부로부터 이탈하지 않는다. 때문에 중앙집권제를 연방제보다 한층 더 발전된 형태로 여기나, 단점은 여러 가지 선행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국왕에 대한 의리를 이해하는 지식 엘리트 계층이 폭넓게 형성돼야 하는데, 고대 사회에서 이를 갖추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식 엘리트 계층, 보통 관료집단으로 얘기되는 이들 무리가 없다면 중앙집권제는 구현되지 않으며, 억지로 실행한다 해도 십중팔구 폭군에 의한 전제정치로 매도되고 전락하기 십상이다. 중앙정부의 매관매직이나 지방 탐관오리의 수탈 또한 중앙집권제의 큰 병폐 중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견해 차이에 불과했지만 차츰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수로왕은 대노하였고 보제와 허루 또한 매우 반발했다.

마침내 보제와 허루는 더 이상 가야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달아나 진한의 서라벌로 들어갔다. 서라벌의 탈해왕은 보제와 허루가 이끄는 무리를 맞아들여 금산 가리촌에서 살게 하였다. 신라 김씨의 시작이다. 가리촌은 나중에 한기부가 되는데, 이는 신라 김씨가 가야의 한기 칭호를 그대로 썼던 연유이다.

그 보통 많이 한번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신라 김씨는 이후 서라벌에서 왕후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서라벌에는 갈문왕이란 제도가 있는데, 왕후의 부친에게 주어지는 봉작으로 그 첫 갈문왕이 바로 허루이다. 갈문왕은 이다음 왕계가 복잡해지면서 왕의 부친이나 왕모의 부친에게까지 추봉된다.

(일요일 아침에 라면 협약해서 출시와 동시에 아니게 하는지라
신라 김씨를 알지라 이르는 것도, 갈문왕이라는 봉작도 모두 흉노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흉노의 언어로 왕후가 알지이며, 알지의 부친은 골도후가 되어 국가의 내정 전반을 맡아보는 것이 흉노의 제도이다. 서라벌의 갈문왕 역시 이 골도후와 비슷하다.

220년 중국에서 한나라가 멸망했다. 가야연방은 오랜 극복의 대상이던 한나라가 사라지자 깊은 안도와 함께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현실적으로 중국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왕망의 이상 또한 긴 세월을 지나며 퇴색되어버린 그때에, 이제 가야연방은 무엇을 할 것인가.

방향이 희미해진 가야연방은 시나브로 결속력이 느슨해지며 언제부턴가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마다 왕을 따로 세우고,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충돌하는 일 역시 당연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4년연속 팀방어율 3점대 누굴지 또 너무하게 느리고.....
수로왕의 꿈은 그렇게 스러지는 듯했다. 제천지윤인 김씨 가문은 이미 번성하여 심히 창대했으나, 중국 신나라 재건은 미완으로 남겨진 채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562년 가야연방이 종말을 고하고, 935년 신라 또한 고려에 나라를 선양함으로써 어떤 가능성의 불씨마저 온전히 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신라가 천년사직을 마치던 무렵, 홀연 한 사람이 먼 북쪽 여진족의 마을 아지고(중국 기록에는 아촉호. 여진 기록에는 안출호)에 들어섰다. 이름은 극수(또는 금준. 중국 기록에는 긍포, 감포. 여진 기록에는 함보, 합부) 성은 김金씨로, 고려 평주 땅에서 왔다고 했다. 김극수가 어째서 고향을 떠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는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잘은 모를 일이다.

김극수는 곧 여진족의 신망을 얻어 추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아골타가 1115년 새로이 나라를 세우니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재밌는 일이다. 고려와 금나라, 양국 모두 군주의 성씨가 임금 왕王으로 서로 같지만 남쪽 옛 신라 땅에서는 고구려의 계승을 천명한 고려가 들어서고, 북쪽 옛 고구려 땅에서는 신라왕성 김金씨의 후예임을 내세운 금金나라가 건국되었으니 말이다. 놀라운 전복이다.

참고로 김씨의 시조 김일제는 엄밀히 말해 흉노족이 아니다. 김일제의 부친을 흉노 휴도왕이라 칭하는데, 이는 정확히 얘기해서 흉노제국에 속한 휴도족의 왕이란 뜻이다. 휴도족의 정체와 기원을 밝히기는 난망한 일이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휴도족의 왕이 탱그리를 모시는 사제 왕으로써 고대의 비밀스런 지식들을 전수하고 계승해왔을 거란 점이다. 신이한 전설이다.